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의 1권을 보면, 주인공 '켄지'는 자신이 다니는 중학교 점심시간에 방송실에서 줄곧 흘러나오는 폴 모리아(Paul Mauriat)의 음악에 격분하여 방송실을 습격해 '우리가 듣고 싶은 건 이곡이야!'를 외치며 자신이 준비해온 음악을 틀어대는 장면이 맨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주인공은 일본 제4중학교에서 처음으로 로큰롤이 사방으로 울려 펴졌음을 회상하고 세기를 구분 짓는 거대한 전설의 서막을 알렸다.
아울러 알다시피 그때 등장했던 음악이 바로 영국의 글램 락 밴드 '티 렉스'(T. Rex)의 '20th Century Boy'이었으며, 그 후에 만화가 영화로 제작되어 커다란 스크린에서 그 익숙한 기타리프와 마크 볼란(Marc Bolan)의 섬세한 목소리가 주인공 켄지의 퍼포먼스와 함께 까만 영화관을 하얗게 밝히기 시작하자,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전율하고 말았다.
20th Century 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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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지난세기다. 우리 인생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지나간 세기는, 단순히 '그래.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20세기였고, 우린 거기에 살았었지' 하는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기엔, 그곳은 여기에서 이젠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무대 위엔 어여쁜 걸 그룹들이 뛰어다니고, 사람의 목소리는 감각적인 보코더에 침묵하며, 계산된 음악적 트렌드는 세계를 순회하는 이 마당에 티 렉스가 70년대 영국 문화의 상징이라는 표현이나 마크 볼란이 29살에 전설로 사망했다는 20세기 유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바쁘게 돌아가는 21세기에 우리들이, 혹은 선배들이 향유했던 20세기 지나간 저항, 락, 히피, 우드스탁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 세기의 영광은 비록 현실 속에서는 사라졌어도 그때를 향유했던 우리들의 영광은 머리 위에서 영원히 살아감을 잊지 않는다. 누군가가 얘기했듯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가끔 그곳에서만 살던 그 보이지 않던 영광을 우연치 않게 현실에서 조우했을 때, 또한 그러한 만남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를 각성시킬 때에는 앞서 언급한 그러한 전율이 내 몸을 스침을 느낀다. 따라서 그룹 '백두산'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오늘 얘기할 <오빠밴드>의 프로그램에 등장했을 때 멤버들이 얼싸안으며 반가워하던 심정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20세기에서 살던 소년들의 가슴속에는 21세기 어른이 된 지금도 전설이 남아있고 그 영광이 숨을 쉬기 때문이리라.
Get it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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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현재 MBC에서 방영중인 <오빠밴드>에서 등장하는 그들 멤버 역시 그 중심에는 지나간 20세기의 소년들의 열망이 숨겨져 있다. 이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21세기 어른이 된 그들이 뭉친 이유를 결국은 음악, 그 중에서도 락과 밴드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열망은 가감 없이 투영된다.
비록 연습이 부족해서 보컬의 키가 바뀌면 연주전체가 어긋나 버리고, 공연 전에는 연주가 따로 논다며 핀잔을 듣기도 하며, 연주가능한 레퍼토리도 몇 곡 되지 못하지만 그들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처럼 그들이 잡은 기타의 무게와 진지함은, 방송이 가지는 그 즐거움 만큼이나 20세기 소년들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새로운 동력으로 무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다 같이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를 연주하고 '딥 퍼플'(Deep Purple)을 동경의 대상이라 말하며,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곡을 연습하는 동시에, '송골매'와 '샌드패블스'의 곡으로 공연에 나선다.
이쯤되면 그 20세기 영광의 꿈을 품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 없이 그저 관망만 하기엔 아주 힘들어진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응원하게 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Children of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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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경복고 '혼수상태'의 베이시스트 신동엽, 역시 23년 전 전 충암고 '앰뷸런스'의 드러머였던 탁재훈, 16년 전 과거의 영광으로 남은 '푸른하늘' 전 멤버 유약한 락커 유영석, 지금도 기타를 배우는 과정인 아이돌 성민, 이론에만 전문가이자 자칭 이사급 매니저 김구라, 그리고 실력은 최고이지만 발언권은 약한 유틸리티 플레이어 김정모. 그런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현재 활동 중인 '화이팅 대디' 밴드처럼 세대가 결합한 멤버들로써 자작곡을 만들고 단독 공연을 갖는 것이라 얼마 전 발표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사실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결과를 향해가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시청자들은 그들과 함께 가고 있다는 일종의 공유의 마인드가 사실 이들 <오빠밴드>가 가지는 최대의 가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프로그램의 특성상 상당부분 연출된 부분의 결과라 치더라도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실제라는 점은 그러한 공유를 더욱 강화 시켜주는 요소로 변화 없이 작용한다.
어찌되었든 주말 저녁, 기분 좋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TV에서 관심을 가지는 락 밴드 멤버들이 시간을 쪼개가며 밤 늦도록 연습하고,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입담 좋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흐뭇하다. 그리고 그들이 잊혀져간 기억속의 20세기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며, 락 음악과 밴드는 언젠까지나 나의 꿈이라고 회상하는 장면은 공감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자. 20세기 소년이자 21세기 아저씨들은 이렇게 이제 TV 앞에서 밴드를 결성하고 기타를 잡았다.
이 20세기 락 키드들이 과연 21세기의 파고에 맞서 어떻게 순항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음악을 대하는 진정성의 크기로 정해질 것이며, 아울러 그들의 뒤에서 무언의 응원을 보낼 20세기 또 다른 소년들 역시 그 크기 만큼이나 앞으로 더 늘어나지 않을까. 아마 21세기라 그동안 얘기하지 못하고 발산하지 못했던 그 답답함이 더욱 배가 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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