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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에세이

Erroll Garner - [Body and Soul (1951)]

[ Erroll Garner ]


스윙이란 쟝르와 비밥이란 쟝르가 재즈의 모든 것을 말하던 시대가 있었다. 또한 유럽이 아닌 미국이 재즈의 모든것을 가졌던 시대가 있었으며, 백인이 아닌 흑인이 그 문화의 중심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버렸지만 난 비교적 확신하는 어조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명 그런 시대가 있었다 라고.

1920년대 그 시절 니그로 르네상스라는 얘기가 경멸반, 질투반으로 당시 미국에서 횡행할때에 당시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적 실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은 지금들어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시절 20년대에 흑인은 어디까지나 광대였을 뿐, 아티스트로서의 인정은 대중들 사이에 무척이나 각박했을 것이란 예상도 아마 진실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웃음이었을 것이며, 그것도 백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웃음이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생각은 무척이나 건방지면서도 또한 무척이나 서글프다. 

배시스미스가 구급차에 도움을 받지 못해 대로에서 죽어나가고 테디윌슨과 라이오넬 햄프턴이 베니굿맨 악단에서 공연장 뒷문으로 왔다갔다 했어야할 그때에, 우리에겐 불멸의 스탠다드인 'Misty'를 만들어낸 작곡자로 유명한 재즈피아니스트 에롤가너의 피아노는 나에게 그 당시 시절에 재즈를 상기시킨다. 베니굿맨과 글렌밀러에 밀려 버린 전기 플레쳐 핸더슨 빅밴드의 스윙과, 뮤지컬에서 멋드러진 연주를 해보이지만 언제나 백인들의 광대로 남았을 패츠월러의 슬픈미소가 그의 피아노에는 녹아있다. 신나지만, 신나지 않은 스윙이 녹아있다.

또한 50년 그 시절에 재즈의 패러다임인 적인 사운드 역시 그의 피아노에 가득 묻어있지만, 그의 은 전위적 예술성보다는 흥겨운 그루브에 가깝다는 점도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물론  <Body and Soul> 몇몇 트랙 -특히 에롤가너가 직접 작곡한 트랙 에서는 당시 시대를 반영하는 꽤나 실험적인 피아노 진행도 들리기도 하지만, 그의 유려한 능력으로 화사하게 감춰져 있는 듯 하여 낮은 수준의 귀를 가진 나로서는 쉽게 눈치채기 힘들 정도니, 적어도 나에게는 밥과 스윙으로 이 앨범을 정리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의 피아노는 안이나 겉이나 그야말로 흑인적 감성인 것이다.

원래 피아노를 치던 아트 블레키를 단 몇분의 연주로 그를 드럼연주자로 보내버린 에롤가너는, 겉 보기에는 하염없이 밝지만 실상은 어두운 그의 재즈 선배들의 연주를 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야성을 이루는 화려한 밤.

그곳에서 연주를 하던 당시 흑인들의 재즈는 돈을 소비하던 백인들의 하얀 피부색보다 훨씬 숭고하고 훨씬 경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내가 언제나 모던 이전에 초기 재즈를 들을때 느끼는 서글픔과 흥겨움의 경계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재즈를 들을때 결코 그 시대를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축복된 나의 운명에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다